그가 10살 되던해에 이미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 알콜중독으로 사망하고
어머니마저 댄스홀 가수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다, 정신이상으로 감금 당해버린다.
10살때 부터 생계를 책임지고 일을 하기시작하며,..곧, 당시 카노(karno)가 이끄는 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전국을 순회하며, 그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해 제법 인기를 얻게 된다.
그 무렵, 전 유럽과 미국은 영화라는 새로운 발명품으로 떠들썩 할때였고, 당시 Keastone Studio를 열고,
한창 희극영화를 만들던 "맥 세닛"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오게된 그는, 그곳에서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다.
그곳에서 영화와 관련된 기술등을 배우며,자신의 기량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다.
키스톤 스튜디오에서 처음 등장한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우스꽝 스런 복장의
"떠돌이" 캐릭터가 만들어지며, 큰 인기를 얻게된다.
헐렁한 바지와, 둥근 중절모, 그리고 콧수염과 지팡이, 우스꽝스런 걸음걸이,
이 떠돌이복장은, 그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까지도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1914년 그의 나이 고작 25살...
그가 바로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이다.
Charles Spencer Chaplin
(1889~1977)
이후, 키스톤 스튜디오와의 계약문제와, 보다 자신의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구로 essany studio,
mutual studio를 거치면서, 직접 메가폰을 잡고, 보다 복잡하면서 스토리가 있는 생명력 있는 "떠돌이"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세닛이 이끌던, keystone studio는, 차후 무성영화시대 최고 희극 배우로 이름을 날리게될, 채플린외에, Harrold Lloyd, Harry langdon,의 출신지가 되어버렸다.그러나 정작, 그 중 누구도 붙잡아 버리지 못하는 불운의 studio로 기록되어졌다.)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외 몇몇 영화인들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중,장편 영화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14년에 데뷔하여, 무성영화의 시기가 거의 종료되는 30년대 초반까지,.. 80여개의 작품을 넘게 만들고 참여하였고,
3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몇 안되는 장편들은 세기의 걸작이라 칭할 명화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시티라이트,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라임라이트 등이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사회적 격변기와, 그의 영화적 이상주의로 인해, 때론 공산당으로 몰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52년 라임 라이트의
영국개봉시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미국에서 그의 재입국을 취소 하는 바람에 결국, 그는 추방이라는 불명예스런 딱지를
붙이고 스위스로 건너가게된다.
이후에도, 뉴욕의 왕(King In New York)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마지막까지 창작활동에 전념하였으며,
72년 자신을 내쫓았던, 미국에서 아카데미 영화제 "평생공로상"수상으로 영광스럽게 초청된다.....
미국은 이 가련한 떠돌이를 뒤늦게 큰 찬사와 환호로 맞이 하였으나, 곧 그는 다시 스위스로 떠난다..
이후, 75년 영국여왕이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으며, 2년 후 그는 스위스에서 88살의 떠돌이 여생을 마친다..
찰리 채플린 경으로...
* 92년 그의 자서전을 토대로 만들어진, 리차드 아텐보로 감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채플린"을 보면 마지막 장면에,
FBI(후버 국장 시절)는, 그를 근 20여년이나 감시하였다고 하고 그의 사생활과 관련한 조사 문서만도 무려 1900여 페이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네번의 결혼을 하였는데, 그중에는 여러 영화중 가장 채플린과 잘 어울렸다고 생각되는 모던 타임즈의
"폴레트 고다르"도 있다..,고다르를 제외한 부인들이 결혼당시에 어린 소녀들 이었기에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러한것들이 역시 FBI가 채플린을 흠집 내기위해 이용되어졌음은 물론이다.
(실제 정신 이상자 여자를 이용하여, 채플린을 친부 소송까지 가게 했던 사건도 있었다. 채플린은 정당히 응했고,
혈액검사 결과 친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채플린은 재판에서 지게 되고 이 판결은 지금도 형편없는 판결로 기록되어진다고한다..)
마지막 부인 "우나 채플린(Oona Chaplin)"과는 죽을때 까지 함께 살았으며, 그가 미국에서 추방당할 당시 우나 채플린 역시
스스로 자신의 미국 시민권을 포기해버렸다고 한다.